그러니까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말야. 어제 오후에 한번 밖에 쓰지 않은 콘돔박스가 공중을 한 바퀴 혹은 두 세 바퀴 정도 돌고 아스팔트바닥에 착지하던 장면이. 여자는 애인의 뒤통수에 콘돔을 던졌다. 애인은 언제나 섹스 뒤에 나태해져서 심드렁한 말투로 충동적인 이별을 고하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뜯지도 않은 콘돔이 큰 자국을 남겼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바닥을 보며 흔적을 찾아다녔다. 혹시 길고양이가 호기심에 뜯어보고 먹을 수 없음을 확인한 뒤 뱉어내서 허연 침자국이라도 생겼을지 몰라. 분명히 아스팔트 위에는 젖어서 색이 진해진 부위가 있었다. 여자가 그것의 냄새라도 맡아보려는 참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근처 여고 교복을 입은 아이였다. 아이는 차 한 대가 지날 수 있을 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아이는 목격자일까. 여자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다음 행동은 무엇이 되어야할까. 황급히 자리를 떠야할까. 혹은 아이의 회상에 동참하여 알리바이공작이라도 해야 하나.
언니도 어제 봤어요?
너무 부조리해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얘. 여자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아이는 어느새 이목구비가 보일 정도로 가까이 와 있었다. 주위에는 부조리가 덕지덕지 붙어있어서 아이가 어떤 것을 콕 집어 지칭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모텔과 대중목욕탕이 즐비한 이 골목의 끝에 여중여고가 있는 것. 치맛자락을 흩날리며 찬란한 웃음소리를 내는 여학생들의 등교길이 공간의 헤테로토피아 속에서 퇴색되어지는 것이 부조리하다. 가로등 기둥에 잔뜩 붙은 안마방 전단지가 부조리하다. 그 와중에 길 한복판에 콘돔이 나뒹굴고 있으니 그것은 한층 더 부조리했을 것이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잠시 웃음을 참는 표정이 되었다. 조금 전의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여자는 여고 앞에 등장한 바바리맨의 기분도 알 것만 같았다.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떠안은 듯한 얼굴의 저 아이에게 좀 더 발칙한 것을 알려주고 싶다. 처음 보는 여자를 아주 쉽게 언니라고 부르고, 눈 앞에 보이는 것에 대한 의심도 가지지 않는 아이라면. 당장 편의점으로 달려가서 술과 담배를 권하고, 콘돔 고르는 방법을 알려주고 기념선물로는 자위기구를. 얼마 전 술자리에서 클리토리스 흡착형 자위기구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기억났다. 저 아이에게는 그게 어울릴 것 같은데.
보통의 보폭으로 두 세 걸음만 걸으면, 그 아이가 있다.
아이가 고개를 든다. 쳐다본다.
크락션소리와 함께 차가 지나간다.
시선이 절단된다.
골목길인데, 저렇게 빨리 달려도 되나. 이봐, 여기는 여고생들이 지나다니는 골목이라고. 끊긴 시선을 주섬주섬 주워 올리는 사이에 여자는 절정 뒤의 감각처럼 많은 일들이 귀찮아졌다. 차가 한대 더 지나간다. 어찌됐든 콘돔은 골목을 지나는 몇몇의 행인에게 약간의 놀라움을 안겨준 뒤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 잘 처리된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아이의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여자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아이가 여자에게 다시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여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로1. 『파-』, 김연수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깊고 어둡고 서늘한 심연이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 심연 앞에서 주춤거렸다. 심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
나를 혼잣말하는 고독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바로 그 심연이다. 심연에서, 거기서, 건너가지 못한 채, 그럼에도 뭔가 말할 때, 가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연 저편의 당신을 향해 말을 걸 때, 그때 내 소설이 시작됐다.
나의 말(言)들은 심연 속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나는 다시 써야만 한다. 깊고 어두운 심연이, 심연으로 떨어진 무수한 나의 말들이 나를 소설가로 만든다. 심연이야말로 나의 숨은 힘이다.
가끔,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나의 말들이 심연을 건너 당신에게 가닿는 경우가 있다.
세로1 . 『브-』, 파울로코옐로
Noting in the world is every completely wrong.
Even a stopped clock is right twice a day.
세로2. 『까-』, 하이즈
그 까만 밤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일까.
세로3. 『레-』, 빅토르 위고
Even the darkest night will end and the sun will rise.
가로1. 『나-』, 무라카미 하루키
여행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때그때 현실에 자신을 몰입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이 그 자리에서 녹음기가 되고 카메라가 된다는 것, 그러고 나서 여행에서 돌아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가라앉을 것은 가라앉고 떠오를 것은 떠오르게 되는데, 그때 비로소 살아 있는 글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여행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어느 지역을 ‘둘러보는’데 그쳐서는 안 되며 그것을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가로2. 『천-』, 나희덕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가로3. 『생-』, 이현승
고독이 수면유도제밖에 안되는 이 삶에서
정말 필요한 건 잠이겠지만
술도 안 마셨는데 해장국이 필요한 아침처럼 다들
그래서 버스에서 전철에서 방에서 의자에서 자고 있지만
참으로 모자란 것은 생활이다.
세로1. 『나-』, 사라케이
하지만 난 내 딸이 이 세상은 설탕으로 이뤄져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단다.
물론 아주 쉽게 부서질 수도 있겠지만, 혀를 내밀어서 맛보는 걸 두려워하진 마렴
그리고 뭔가 잘못을 했다면 항상 사과하길 바란단다. 하지만 네 눈에 총기가 흐려지려할 때 그것에 대한 변명은 하지 말았으면 한단다 네 목소리가 작더라도 절대 노래를 멈추지 마렴.
또 사람들이 네 가슴을 아프게 할 때, 혹은 길모퉁이에서 네게 살며시 전쟁과 증오, 냉소와 패배의 전단지를 건내줄 때, 그들에게 꼭 날 보러 오라고 말해 주려무나
세로2. 『춤-』, 김리영
단 한 장 찍어내는 모노타이프
발밑에 밟혀오는 뜨거운 활자들
3분 34초 공연 시간이 흘러가버리면
다시 불 켜져도 읽을 수 없을 거야
참을 수 없게 차오른 숨
춤으로 맥박을 바치는 편지를 전한다]
내 이름, 진우. 170대 중반의 호리호리한 체격, 희미한 인상. 거리를 걷다 보면 하루에 적어도 다섯 번을 마주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30대, 직업은 회사원. 서울 근처 아파트에서 세 살 젊은 아내와 갓 돌을 넘긴 딸아이와 함께 생활한다. 나는 아주 잘생긴 편도, 그렇다고 흉하게 못난 꼴도 아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다. 그냥 나는 지극히 평범한 XY염색체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넥타이가 좋다.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든 트레이닝 복이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바깥에 나갈 수 있는 모든 옷이라면. 넥타이는, 뭐든지 말끔하게 보이게 하는 신기한 재주가 있기 때문에. 내 삶에서 뭐든지 한 번에 쉬운 일이란 없었다. 옷을 고르는 사소한 일부터, 친구를 사귀는 일, 학교에 입학하는 일 - 그래 꼬박 3수를 해서 들어갔으니까 - 그리고 결혼까지. 남들은 잘만 뻥뻥 문을 차고 들어가는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겐, 문고리를 잡는 일조차 벅차기만 했다. 아내와의 결혼도 무려 열 번이 넘는 연애의 끝자락에 겨우 걸쳐있던 것이니까. 일종의 유치한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내 20대도 나름 찬란한 구석이 있었다. 사실 꽤나 재밌기도 했다. 무려 아홉 번의 연애를 시작했고 끝마쳤다. 아주 형편없는 편은 아닌 것이다. 아홉 번의 시작은 모두 달랐지만 끝은 결국 하나였다. 오빤 너무 착해, 더 좋은 사람 만나. 아주 깊이 상심하여 나의 착한 심성을 탓할 때쯤 만난 사람이 바로, 내 아내다. 언젠가 문득 그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신, 당신은 왜 나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거야?
- 자기야. 나는 잘난 체하고 시끄럽고 골치 아픈 사람은, 딱 질색이야. 자기는 착하고 말도 잘 들어주고 통하니까 좋아했지 내가. 아무래도 좋았어.
그녀는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쉼 없이 대답했다. 가슴 한 구석이 휑한 것 같았으나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직장, 그럭저럭, 여덟 시 출근, 여섯 시 퇴근, 딱 거기까지. 싫지도 좋지도 않은 아니 아무런 감정이 없는 공간이다. 빌딩 숲 속 작은 휴식, XX커피 - 출근 길 오른편에 보이는 광고 문구가, 참 진부하다 못해 이젠 귀엽게 느껴진다. 얼씨구, 빌딩 숲이라뇨. 실컷 멋지게 지어놓고서 굳이 또 그걸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의 심리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상쾌하다, 숲이라며, 다 한 가지 아닌가. 연봉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친척들의 조잘거림과 회사가 꼬박꼬박 보내주는 돈에 대한 집착에 영락없이 붙잡힌 꼴이 스스로 불쌍하면서도 나쁘지 않다. 참 우습다. 어쩌면 그건 어릴 적 이미 예고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어쩌면.
얼음 땡, 하는 시시껄렁한 놀이를 기억한다. 그러나 땡, 해도 분주하게 뛰어다닐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래봤자 목줄이 당겨올 뿐이기 때문이다. 아주 다행히도 나는 미리 알아차렸다. 얼음 땡, 했을 때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보호받는 것이라는 것과 너 꿈이 뭐니, 하는 어른들의 질문에 하늘을 나는 것이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 사랑받는 정답임을 아주 다행히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을 꿈을 묻고 얼음을 땡, 하고 깨는 어른의 눈동자에서 발견한 그것은 그러나 사랑도, 기쁨도, 환희도 전혀 아니었다.
그건 안도였다.
아무런 반전 없이 미끄러진 나의 스무 살, 뼈아픈 첫사랑과 마주했을 때의 나를 기억한다.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서 미끄러지듯 달리던 길에 남은 것은 결국 퉁퉁 부은 내 발과 조여오는 목 줄 뿐이었다. 등호의 감옥 속에서 퍼져나가는 다름의 향기에, 아니 악취에, 돌아오는 흘깃거림과 눈초리는, 그리고 이 세상은, 이 모든 것은 이미 나에게, 전혀 타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복종이었다. 나는 차라리 알고리즘 속 하나의 순서이고 싶다. YES,NO- 3번 문제로 이동, 성공, 아니 실패. 이렇게 묶여있는 삶이, 훨씬 더 편하다. 어차피 곧 쌓이고 쌓여서 덮혀질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이라곤 가끔씩 묵혀진 때를 벗겨주거나 탈탈 털어주거나 하는 행동으로 충분하다. 커피숍에 가서, 바쁜 척 다리를 꼬고 앉아있으면, 그렇게 되는 세상이니까.
슈리
있지.
응.
패턴 뭐야?
패턴?
휴대폰 잠금 패턴.
그게 왜?
궁금해. 봐야겠어.
어떤 게?
그냥, 네가 패턴 너머에 숨겨둔 것들.
봐서 뭐 하게?
거기엔 내가 모르는 네가 있잖아.
볼 것도 없을 텐데.
꼭 볼 게 있어서 보는 건 아냐.
아, 근데 나 지문 인식인데.
흐응, 그러니까 지문으로만 풀 수 있다는 거지?
그런 셈이지?
지문 모양이라도 외워야 하는 건가.
그렇게까지 보고 싶어? 지금 풀어서 보여줄까?
아냐, 그러면 내가 직접 풀고 싶거든. 관둘래. 지문이나 보여줘.
외운대도 풀 수는 없을 텐데.
알아, 그냥 보려는 거야. 꼭 미로 같잖아.... 지문에도 입구와 출구가 있을까?
글쎄, 한번 찾아볼래?
손가락마다 단 하나뿐인 미로들이 있다는 게 근사하지 않아?
그럼 손가락마다 영영 길을 잃게 생겼는걸. 계속 빙빙 돌기만 하잖아.
그렇다면 더 근사한데. 나는 내 미로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였으면 좋겠어. 그럼 영원히 풀 수 있잖아.
그런 미로라면 나는 애초에 들어가지 않겠어. 길을 잃는 건 끔찍해. 영영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영영 길을 잃어야만 영원한 미로가 되는걸. 그거야말로 진짜 미로인지도 몰라.
길을 찾지 못한다면 미로에 들어간 게 무슨 소용이야?
길을 찾고 나면 미로가 다 무슨 소용이야?
어쨌든 나는 길이 없는 미로는 이해할 수 없어.
모든 걸 꼭 이해할 필요는 없으니까.
가만, 그런데 내가 패턴을 알려줬어도 그건 네가 직접 푼 게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
뭐야, 앞뒤가 안 맞잖아.
패턴 안 해 놓은 거 알고 있었거든.
응?
난 그냥 너의 영원한 미로들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종소리
이동근
-너, 내 말 듣고 있어?
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건너편의 사람 쪽으로, 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움직임으로 자세를 숙였다. 그리고 탁자 구석에 올려놓은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시커먼 물이 빨대를 통해 빨려오는 소리가 마치 머릿속에 울리는 듯 들려왔다.
너 속은 괜찮아? 어제 많이 마시던데. 아니, 전혀 안 괜찮아. 아침에도 빌빌거리다가 겨우 일어났거든. 우린 역시 우주먼지 인가봐. 우주먼지? 아까 교수님이 말씀하셨잖아. 우리 몸을 이루는 물질이 우주로부터 왔다고.
강의 중에 그런 말이 나왔던가. 선은 자신이 들었던 목소리를 되새겨 보았다. 소음과 소음과 소음과 소음. 와중에 먼지 얘기가 나왔었던 것 같기도 하다.
도서관에 가면 녹음본을 들어야겠다. 그녀는 주머니에 슬그머니 손을 넣어 녹음기가 그대로 들어있음을 확인해보았다.
녹음기에는 강의만 들어있지 않았다. 강의를 녹음해 다시 들어보며 공부하듯, 선은 중요하든 중요하지 않든 온갖 대화를 녹음해 들어보고는 했다. 그녀가 미처 듣지 못한 중요한 한 마디가 있을까봐, 혹은 자신이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하는 두려움에. 그녀의 노트북 어딘가에 수많은 목소리가 숨겨져 있는 건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술 마시면 기억이 잘 안 나서.
선은 얼버무리며 고개를 조금 더 기울였다.
기억이 잘 안 난다기보다 듣기를 포기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기는 했다. 그 소음 속에서는 녹음기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선은 술자리에 가면 누구보다 빨리 취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가 ‘고막 저편에서 칠판을 긁는 소리’ 라고 표현하는, 그녀에게만 익숙한 소음은 술을 마시면 더욱 심하게 들려오기 때문이었다. 취한 사람에게는 보통 대답이 이상하다고, 혹은 말을 무시한다고 이상한 시선을 주지는 않으니까.
-차갑다.
하루는 김이 솔솔 올라오는 유리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유자차는 뜨거워 혀가 데일 정도였지만 그것을 담은 잔은 차가웠다. 차가운 잔을 쥐고 뜨거운 차를 마시면 그 중간 정도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럴 리 없다는 말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뭐가 그럴 리 없어? 차가운 잔을 들어 뜨거운 차를 마시면 따뜻할 거라는 생각이. 손은 아리고 목구멍은 뜨거울 뿐인걸.
먼지도 온도에 민감하나 보네.
갑자기 내려간 기온은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다. 문득 눈을 떴을 때, 비가 올 줄 알았던 창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걸어가는 길에 눈앞을 흐리던 김은 들고 있던 종이컵으로부터 나오는 것인지 하루의 입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종이컵은 손이 시리지 않았는데.
눈은 밤이 오기 전 그쳤고, 지난 며칠은 종종 비가 내리는 나날이었다.
내일은 맑을까, 비가 올까, 아니면 눈이 올까.
하루는 호호 불어 조금은 식은 유자차를 마신다. 입김이 아닌 것은 여전히 날리고 있었다.
어느 날도 따뜻하지는 않은걸. 그녀는 내일은 더 따뜻한 옷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는 왜 나에게 고개를 기울이는 걸까.
차마 묻지 못한 말을, 하루는 공책 귀퉁이에 작게 끼적였다. 너는 왜 항상 나에게 점점 기울어 오는 걸까. 처음 만날 날부터 한결같이, 선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하루에게 가까워졌다. 그녀는 선의 옆모습을 앞모습보다 훨씬 가까이 볼 수 있었다. 조금 벌어진 입, 붉은 기가 도는 볼, 가만히 감은 눈. 그때마다 볼 수 없는 것은 그녀의 표정, 그녀의 눈동자.
너는 왜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걸까.
종이를 찢어버릴 듯이 긋던 하루는 펜을 책상 귀퉁이로 던져버리고 팔을 괴어 엎드렸다. 엎드린 채로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보면 자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루는 팔을 뻗어 자기 얼굴로 가득 차는 거리까지 거울을 끌어왔다. 비가 오기 시작했는지 거울 너머로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더 추워진다면 저 방울들이 얼어 눈이 될 텐데, 생각하며 하루는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 보던 것들의 잔상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눈꺼풀 속은 짙은 밤과 같이 어두웠다. 그녀는 괜히 눈을 비벼보았다. 하얗고 붉은 기운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거울 속 나의 모습 역시 잔상으로 남아있을까?
하루는 문득 궁금해졌지만 잔상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빗소리가 세차지고 있었다. 하루는 눈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이 오고 있어. 같이 눈 맞으러 나가지 않을래?
그녀가 누구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것은 ⌁⌁⌁ 하여서 ⌁⌁⌁ 이지요.
선은 혼자 있을 때면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쓰곤 했다. 이건 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모든 것이 들리는 것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의 귀에서 이상을 발견한 의사는 없었다. 귀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심리적인 요인 때문일 수도 있어요. 좀 더 큰 병원으로 ⌁⌁⌁ 어쩌면 ⌁⌁⌁
나는 아프지 않아. 안으로부터 나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선은 그것이 멈출 때까지 자신에게 속삭이거나, 말할 수 있는 때가 아니면 수첩에 문장을 적었다. 소리는 그녀가 필요로 할 때 멈춰주지 않았다. 또 그녀가 필요로 할 때 언제나 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선의 의지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랬기에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머릿속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만들어낸 상상 속의 소리라면 멈출 순 없어도 적어도 들리게는 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냐, 라고.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아프다 말하지 않았다. 단지 정말 무언가가 소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고 단지 그 무언가가 자기 귀 속에 있을 뿐이라고.
나는 ⌁⌁⌁ 않아.
-낙엽이 지지 않은 나무들이 있어.
선은 창문 너머로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누렇게 말라버린 잎들이 아직 매달려 있는 가지들이 있었다. 하루에도 초겨울과 늦가을을 오가는 변덕스러운 날씨 탓일까.
나뭇잎은 왜 떨어지지 않는 걸까? 붙어있을 곳을 잃고 싶지 않아서일까? 바람에 날아가는 순간부터 의지할 곳 하나 없어지니까.
고개를 돌려 탁자 건너편을 바라보니 하루는 어느새 고개를 묻고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숨에 맞춰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다. 자는구나. 나뭇잎은,
나뭇잎이 흔들릴 때 작은 종이 울리듯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나면 어떨까, 그녀는 상상해보았다. 세상은 소음으로 가득 찰 것이고 모두의 귓가에 종소리가 울릴 것이고 내 귓가의 소음은 평범한 일상이 되고-
⌁⌁⌁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면 나는 무엇으로 남을까.
하루는 땅에 떨어져 바스러지는 단풍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잎들이 공터의 벤치 사이로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 풍경이 마치 나무가 살해당한 현장과 같다 생각했다. 나무를 죽여 벤치를 만든 현장. 흩뿌려진 나무의 혈흔.
영하권의 날씨가 이어지는 계절에 여전히 가을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 우스운 일이야. 하루는 걸음걸이를 크게 하여 붉은 낙엽을 날리며 걸어갔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쳐갔다. 해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해가 가장 높이 떠 있는 시간에서 조금만 지나도 공기는 차가워졌다. 바람과 함께 그늘도 넓어지고 있었다. 하루는 한쪽 다리는 해가 비추는 곳에, 다른 쪽 다리는 그늘에 대고 걸었다. 낙엽은 그늘에 몰려있었다. 그녀는 따뜻하면서도 서늘한 가장자리를 사랑했다. 한 편으로 쏠리는 것은 쉽게 질렸다.
따뜻하고 차가운 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하루는 뜨거운 차가 담긴 유리잔을 떠올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날 정도로 끓인 차와 그것들 담고 있는, 손이 아릴 정도로 차가운 잔. 그녀는 그 중간을 가리키는 말들로 표현할 수 없는 경계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차와 유리잔이 닿는 그 곳에 서있어.
하루는 신기한 발견을 한 양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넓어지는 그늘을 피해 구세군 냄비가 보도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딸랑 딸랑, 종소리가 울린다.
-어제 너를 보았어.
누군가 선의 어깨를 치며 말을 걸었다. 각자 책을 펼치고 공부하던 선과 하루는 동시에 고개를 들어 말을 건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를 보았다고? 아니, 너 말고 하루를 봤어.
그런데 왜 내 어깨를 치며 말했어? 마치 나를 보았다는 듯이.
선은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입 밖으로 내어 물어보지는 않았다. 다들 때로는 자기 자신도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는 하니까. 그녀가 보기에 그 행동에 무슨 의도가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단지 자신이 복도 쪽 자리에 앉아 있어 인기척을 보이기 편하니까.
하루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왜 그렇게 신경질이 난 걸까.
하루는 침대에 누워, 신경질적으로 말해서 미안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평소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으니 그녀도 꽤나 당황했을 것이다. 하루는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며 다시금 부끄러워졌다.
왜 나를 봤는데 선의 어깨를 쳐?
기분이 나쁨을 표현할 의도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이유를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하루의 의도와는 달리 굉장히 날카롭게 말이 나왔다. 듣는 사람들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당황할 정도로. 그는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놀란 기색이었고 선 역시 동그래진 눈으로 하루를 바라보았다.
왜 그랬어?
잠시 인사말을 나누고 그녀가 사라지자 선이 하루에게 물었다. 왜 그랬던 걸까, 그녀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 너무 피곤해서 말이 이상하게 나왔다고 해야 했을까?
하지만, 내가 왜 그랬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어. 알고 싶지 않아. 어느 날부터인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점점 가까워져 오는 너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고 싶어지는 이유를. 어느 날 부턴가 잘만 하고 다니던 팔짱을 끼는 게 부끄러워진 이유를. 너의 옆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볼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는 이유를. 계속 모르는 채로 있고 싶어. 이 마음을 알아가기가 두려워. 어쩌면 내가 너를-
⌁⌁⌁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린다.
-십이월의 끝을 향해 가며 종소리는 어디에서나 들려온다. 선이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를 꺼내 구세군 냄비에 집어넣자, 하루 역시 그녀를 따라 지폐를 꺼냈다. 붉은 코트를 걸치고 인사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하루는 성탄절이 가까워졌음을 실감한다.
이번에도 눈은 오지 않는대, 맑은 하늘을 쳐다보며 선이 말했다. 당분간 지금처럼 맑고 추운 날씨가 계속될 거라고 했다. 성탄절에 눈이 오면 퍽 낭만적일 거라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 그 날 눈을 맞은 기억은 없었다. 선은 손바닥을 펴 내밀었다. 마치 무언가 내리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어제 온 눈이 쌓였다면 좋았을 텐데, 다 녹아버렸어. 이토록 추운데 어떻게 남김 없이 사라져버렸지? 처음부터 쌓이지 않을 눈이었으니까.
그 눈송이들은 자신이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거라는 걸 알고 있을까, 내려오는 내내 그 생각에 슬프지는 않을까. 하루는 자신이 눈송이였다면 어땠을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마 슬플거야. 왜? 자신이 존재했다는 근거조차 남기지 못한다는 것은.
선은 하루를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웃으면서도 자신이 어느 부분을 못 들은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방금 하루가 한 말 조차 정확히 들었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너는 나와 대화하면 어떤 기분이야?
생각에 잠겨 걸어가던 선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멈추고 돌아보았다. 어느새 하루는 그녀 뒤에 상기된 얼굴을 든 채 서있었다.
어떤 기분이냐는 건 무슨 말일까. 내가 자기 말을 안 듣고 있다고 생각해서, 화가 난 걸까. 내가 자기 할 말만 한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하며 선을 비난했고, 그 때마다 그녀는 그에 대한 변명을 하지 못했다. 단 한 번도,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적어도 그런 순간만큼은.
굳어가는 선의 표정을 보며 하루는 자기 마음 속 무언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선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 지금 나의 말-고백-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어. 그녀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웃지 못할 망정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미안해.
선이 속삭이듯 말했다. 하루 역시 입을 열었다.
나는-
⌁⌁⌁ ⌁⌁⌁ ⌁⌁⌁
종소리가 울린다.
한 조각이 빠진 퍼즐
괜찮아요 나도 오늘 점심을 빠뜨렸거든요
도서관 책은 62쪽 아래 귀퉁이가 찢겨 있었지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한 조각이 없어도
나는 이 그림이 호박밭 그림인 걸 잘 알고 있거든요
어쩌면, 이사할 때쯤 조각을 찾을지도 몰라요
우리 이따금 체스를 두곤 했지요
체스판도, 몇 칸쯤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당신이 체크메이트를 외쳐도 나는 수를 무르지 않지요
어쩌면, 이 조각은 영영 못 찾을지도 몰라요
신경쓰지 않아요 애초에 나는 큐브를 맞출 줄 모르거든요
미로도 한참을 빙빙 돌아야 해요
빈 부분에 내가 아는 호박이 없다 해도 괜찮아요
설령 그게 까마귀가 그려진 조각이었대도,
나는 이 그림이 호박밭 그림인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