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에게 독서의 시간이 책의 두께로 치환된다면 렌즈의 반대편처럼 작가에게는 창작의 시간이 책의 두께로 압축될 것이다. 책의 크기는 작아도 그것이 담고 있는 것은 결코 작지 않다는 말을 나는 책이 어마어마한 지식이나 진리를 담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책 속에 작가의 시간이 높은 밀도로 압축되어 있다는 말로 이해한다.
시인 안희연의 여행기 <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여행기는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이 있다. 책 속에 두 층위의 서로 다른 시간이 겹쳐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여행을 하던 작가의 시간(여행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책으로 엮어내는 작가의 시간(문학의 시간)이다. 누군가 안희연의 여행기에 실린 사진과 에피소드를 보며 감동한다면 그것은 사실 여행의 시간 자체가 아니라 문학의 시간이 덧씌워진 여행의 시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여행은 ‘지금 이 순간의 이름들’로 한 권의 사전을 편찬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펼치면, 색색의 기억들이 상연되는 극장.
-202p, 지금 이 순간의 이름 중-
여행의 시간, 경험하는 시간
여행의 시간이란 이런 것이다. 몇 해 전, 안희연은 유럽 여행을 하다 브레멘의 한 광장 벤치에 앉았다. 밝은 햇살이 광장 반대편의 건축물에 부딪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건축물 맞은편 벤치에 앉아 안희연은 한 앳된 연인을 바라본다. 소녀는 키스를 조르고 있었고 소년은 소녀를 밀쳐내고 있다. 그들의 몸이 만들어내는 각도가, 자꾸만 소년 쪽으로 기울어 가는 소녀의 각도가 안희연의 마음에 어떤 파문을 만들어 낸다. 안희연은 얼른 사진기를 꺼내 순간을 담는다. 순간이 사진기 속에 남는다. 동시에 안희연의 마음 한 조각이 그 자리에 남는다. 브레멘을 떠날 때 안희영은 마음 한 조각을 광장에 남기고 돌아온다.한번 여행을 떠나면 기본이 한두 달 이었으니 그간 마주한 장소나 풍경도 어마어마하게 많을 것이다. 게다가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는 것은 그 장면에 마음을 움직인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일 텐데
-21p, 잔상과 여진-
문학의 시간, 덧씌워지는 시간
그리고 몇 해 뒤, 안희연은 떠나간 누군가를 생각하며 문득 브레멘 광장을 떠올린다. 곧이어 여행의 시간은 문학의 시간 속으로 들어온다. 작가는 여행의 시간을 현재의 상황과 감정에 연결시켜 종이 위에 배열한다. 문학의 시간을 거친 브레멘 광장의 시간은 이렇게 서술된다.
그러다 우연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이 있었어. 몇 해 전 유럽을 여행하다 브레멘에서 보았던 장면. (중략) 브레멘 광장에서 보았던 젊은 연인.
나는 맞은편 벤치에 앉아 그들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아주 젊은, 아니 앳된 연인이었는데. 소녀는 계속 키스를 조르고 있었고 소년은 귀찮다는 듯 소녀를 밀어내고 있었지. 나의 시선을 붙든 것은 다름 아닌 소녀의 기울기였어. 쏟아질 듯, 흘러 넘칠 듯 위태로워 보였던 소녀의 기울기. (중략) 나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사랑은 상대를 향해 한없이 기울어지는 마음이고 기울기가 크면 클수록 존재는 위태로워 진다는 생각을.
(중략)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랬어. 나는 소녀에게서 내 사랑의 방식을 읽어 내고 있었어. 너무 사랑하면 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멈추는 방법을 몰라 까맣게 타들어 가던 날들. (중략) 나는 너무나 기울어져 있었던 거야, 어리석게도.
-189~190p 너를 사랑한 시간 중-
그러니까 문학의 시간은 박제돼 있던 여행의 시간을 불러내어 현재를 덧씌우는 작업이다. 여행기의 제목은 이런 과정들을 그대로 담아낸 것은 아닐까.
다시 모인 마음들이, 안녕.
많은 시간과 장소에 흩어진 마음들에 찾아가 인사하고, 그 조각들을 2cm 남짓한 두께의 여행기에 담아내는 일을 작가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여행도 문학도 모두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으므로. 두 시간의 겹침이 작가의 마음에는 어떤 화학 작용을 일으킨 듯 보인다.그곳에 펼쳐진 알록달록한 풍경들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인사를 건네게 됐다. 그간 안녕했냐는 인사와 앞으로도 안녕해 달라는 인사.
앞으로도 나의 삶은 그런 인사들로 채워질 것이다. 매사 헛발질만 하며 사는 것 같아도 그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었음을 부정할 수 없듯이. 그걸 모르지 않기에 삶은 더욱 애틋하고 한걸음은 언제나 멀 것이다.
–247p, 아주 먼 한 걸음-
따라서 이 책의 창작은 독자를 위한 일이 아니라 안희연 시인 스스로를 위한 과정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시인이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하고 인사하면 책의 모든 흩어졌다 다시 모인 마음들이 시인에게 안녕, 하고 인사하는 장면이 자꾸만 상상된다. 그래서인지 이 여행기는 누군가의 연애편지를 읽는 느낌으로 읽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