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ARD
KARE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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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호. 20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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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지다



『함께의 그리움 1』 choo


 주중날씨
이동근

             전국이 흐리대요. 어제까지만 해도 맑았는데. 태풍이 제주도 바로 아래를 지나고 있다나봐요. 내일 오후부터는 여기도 비가 온다고 하네요. 꽃샘추위를 몰고 오려나봐요. 

   하긴 요 며칠, 아니 이 삼 주 정도 됐죠, 이상하게 따뜻하더라니. 겨울이 막 가려고 하니까 곧장 태풍이라니, 끔찍해요. 그래도 긍정적인 건 태풍이 가고 꽃샘추위도 가시고 나면 
이 겨울도 정말로 끝나리라는 거죠. 그때 가서도 저 꽃들이 남아있을지 걱정이네요. 원래는 태풍이 지나고 나서부터 꽃망울이 조금씩 열리곤 했는데 올해는 늦겨울이 유난히
따뜻해 가지고 벌써 저렇게 펴버렸으니. 음, 지금도 봄이라 치면 안 될까요? 안되죠. 나는 인정할 수 없어요. 꽃이 저렇게 폈는데요? 어차피 내일이면 다 바람에 날리거나
비에 맞아 떨어질 텐데요. 그럴까요? ⋯⋯나랑 내기 하나 해보지 않을래요? 어떤 내기요?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다음 주 월요일에 이 카페,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거예요.
  봐요. 개나리, 진달래, 목련, 모두 여기서 잘 보이잖아요? 찬바람은 유리창이 잘 막아줄 테고. 3월의 날씨는 항상 그렇죠. 창가에 붙어있으면 햇볕 덕에 따뜻하잖아요? 그건 맞죠. 
  그런데, 그렇게 만나서 뭐 어떡하자고요? 더 들어봐요. 저 꽃들이 여전히 잘 버티고 피어 있다면 당신이 내게, 전부 져버렸으면 내가 당신에게 맛있는 차와 파이를 사는 거예요.
  ‘전부’ 져버리는 건 나에게 너무 불리한 조건 아닌가요? 아니, 애초에 처음 보는 사람과 이런 내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황당한데. 좋아요, 그럼 전부는 말고 반으로 하죠. 
  반 이상이면 내가, 이하면 당신이 이기는 거예요. 이제 할 만 하죠? 말은 그렇게 해도 당신의 입 꼬리가 올라갈 듯 말 듯 하고 있어요. 내 제안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거죠. 
  꽤 유쾌한 상황이잖아요? 하하, 봐요, 정곡을 찔리니까 웃음이 나오잖아요. 어때요, 해볼 거죠? 잃을 건 디저트 값밖에 없어요. 아뇨, 난 아무것도 잃지 않을 거예요. 마시고 싶은 차 
생각해볼게요. 참고로 난 피칸 파이를 좋아해요. 자신감이 넘치네요. 이유 있는 자신감이죠. 좋아요, 그럼 다음 주 월요일 오후 세 시에 봐요. 알았어요. 어쩔 수 없네. 즐거웠어요, 
  당신도 즐거웠기를 바라요. 하하, 안녕. 안녕.

             잘 지냈어요? 겨우 사흘 만이라 그런지 딱히 바뀐 건 없는 것 같네요. 언제나처럼 지냈죠. 언제부터 와있었어요? 두 시 반인데, 벌써 커피 한 잔을 다 마셨네요. 제가 원래 

차가운 음료를 빨리 마시는 편이에요. 그래서 술자리만 가면 가장 먼저 취해버리죠. 하하. 오시기 직전에, 어차피 따로 갈 곳도 없는데 먼저 가서 커피 한 잔 하고 있자 했죠. 
  당신도 30분이나 일찍 오셨네요? 늦는 걸 싫어해서요. 더더군다나 딱 한 번 마주친 사람과의 약속에 늦는 건 예의가 아니죠. 다행이네요, 사실 안 나오시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약속했으니까요. 나쁜 사람도 아닌 것 같았고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아, 미안해요. 방금 말은 사과할게요. 아뇨, 괜찮아요. 갑자기 말을 걸더니 내기하자고 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죠. 바깥 공기는 많이 찬데 역시 카페 안은 따뜻하죠? 가만히 앉아서 바깥을 보고 싶은 날이면 종종 오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풍경이 달라서 
지루하지가 않아요. 네, 따뜻하네요. 여기서 바라보면 바깥도 전혀 춥지 않을 것 같은데. 오늘은 달달하고 따뜻한 것이 끌리는 날이네요. 저는 카페모카 한 잔 마실게요. 괜찮죠? 
  네, 어쩔 수 없네요. 꽃이 저렇게 많이 질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예보한 것보다 비도 한참 적게 내리기에 버텨줄 줄 알았는데. 후회돼요? 내기 하자고 한 게요? 그럴 리가요. 잃는 건
디저트 값밖에 없는걸요. 그럼 주문하러 같이 가실래요, 아니면 앉아서 기다리실래요? 같이 가요. 어차피 사람도 없어서 자리 빼앗길 일도 없을 텐데. 좋아요. 사실 피칸 파이와 호두 파이의
차이점이 뭘까 궁금해서 찾아봤었어요. 저는 피칸과 호두가 같은 종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종류더라고요. 호두가 영어로 피칸이 아닌 건 알고 있었는데, 생긴 게 워낙 
비슷하다보니 같겠거니 생각했어요. 전혀 다르죠. 전혀 다른데, 사실 그 말 들으면서 생각한 건데, 피칸 파이와 호두 파이를 맛으로 구분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요. 피칸 파이 좋아한다면서요?
  좋아하죠, 그런데 사실 저도 둘이 같은, 아니면 적어도 맛은 구분 안 되는 그런 종류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여기서는 피칸 파이밖에 안 파네요. 둘 다 시켜서 먹어보면 차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쉽네요. 그러게요. 말이 나오니까 맛이 어떻게 다른 건지 궁금하네요.
 
  ⋮
   ⋮
   그러면 혹시, 다음에는 같이 호두파이 먹으러 가보지 않을래요?
   
⋮
   ⋮


주말날씨

   가벼운 비가 한 차례 지나갔다.

   가볍게 지나가는 태풍이었다.

   오늘도 꽃은 지지 않았다.

   꽃이 지지 않아도 그 사람이 나올까?

   이름이라도 물어봤어야 하는데.

   망설였지만 결국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봄바람이 부는 듯한 사람.

   습관처럼 가던 곳이 조금 특별해졌다.

   꽃잎이 아주 조금 떨어졌다.



   한 잎, 한 잎, 조심스럽게 뜯어본다.
   우연이 인연이 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언제부턴가 인정하게 되었다.

   찬바람과 따뜻한 햇살과 두근거림,

   내일도,


   당신도 같은 마음일까?




가벼운 비가 한 차례 지나갔다.

묘하게 내기가 신경 쓰인다.

아마 꽃은 그대로 피어있을 텐데.

어떤 사람일까?

이름이라도 알아둘걸 그랬나.

눈동자가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묘한 편안함이.

어쩌다 가본 곳에 다시 가고 싶어졌다.

특별함을 잃지 않고자 참아본다.
특별함을 잃지 않으려면 때로 기다려야 한다는 걸
언제부턴가 알게 되었다.



봄이 다가와서 그런 걸까,

오늘도,



당신도 같은 마음일까?


바이올렛 (423nm정도) -최서영

 

보랏빛 살짝 깃들어, 깊고 풍부한 색감으로 만개한 수국을 손끝으로 건드린다. 손 끝으로 만져 가볍게 말랐을 때, 조심스레 묶어 거꾸로 매단다. 그 옆엔 아흐레 전 걸어 놓아 연한 갈색으로 변한 홍화가, 또 옆엔 얇고 은은한 바이올렛의 미니 델피늄이 매달려있다. 세워 말리면 혹시라도 꽃봉오리가 꺾일라 거꾸로 매달아 둔 꽃들의 물오름이 건조되는 모양새를 찬찬히 살핀다. 내밀한 즐거움을 주는 건조화들과 빛바랬지만 계속되는 아늑함을 지닌 이 꽃들에 부드럽게 흩어지는 햇살 조각.

그렇게 소중히 말려 놓은 수국을 살짝 건드렸더니 건조해진 꽃잎이 애처롭게 바스러져 흩어진다. 그렇게 단 한 번 건드렸는데, 그렇게 쉽게 온 꽃이 흩어져, 부서져 버리는데,

하물며 사람의 마음은!

강다예

나의 플라타너스

 




한아, 안녕?

이 네 글자를 적는 데 얼마나 많은 편지지를 버려야했는지...
그 곳은 여전히 겨울이겠지?
여기는 벌써 따뜻하다. 창 밖 세상은 어느덧 봄을 맞으려 꿈틀거리는데, 방 안의 나는 여전히 움츠리고 있다. 실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C로부터 네 소식을 들은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도무지 너에게 글을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가 엊그제 F극장 옆 기둥에 붙여진 포스터를 보고선 이끌리듯 보러 간 어느 극단의 공연에서, 문득 그럴 생각이 났다. 팽팽하게 걸린 줄과 그 줄 위를 걸어가는 여자 곡예사의 불안한 시선 바로 그 틈 사이로 네가 울렁거리면서 솟아올랐다면, 너는 믿을 수 있겠니?
 
반짝거리는 옷을 입은, 작은 체구의 여자 곡예사였다. 극장 옆 기둥에 삐뚤어지게 붙여져 있던 포스터 속의 그 여자였어. 거기에 걸린 그림보다 여자는 많이 왜소했고, 마치 창백함에 전염된 플라타너스 나무 같았어. 하지만 놀랍게도 그 여자는 칠이 다 벗겨진 나무 사다리를 타고 성큼성큼 올라갔고, 그리고선 자기 키 보다 갑절은 긴 듯한 사다리 끝에 서서 두 팔을 쭉 피고 뽐내기라도 하듯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어. 나무는 모든 필요한 영양소를 흡수한 후 필요가 없어진 나뭇잎들을 떨어트린대. 그 여자는 줄을 타기 전 무슨 신성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야윈 팔을 억세게 흔들었고, 마치 “저리 꺼지란 말야”하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았어.
 
그 순간은 참 묘했다.
가만히 숨죽인 객석, 왼쪽 열 아저씨의 큼큼하는 목 울림, 가느다란 줄, 그리고 플라타너스 나무 한 그루. 

한아 난 봤어, 아주 오래되고 지친 그 나무의 여린 살이 천천히 한 움큼씩 뜯겨나가고 있었다.

기대에 찬 관객과 창백한 그 여자 사이에는 야릇한 기류가 흘렀어. 여자는 아주 꼿꼿하게 서있었다. 돌연 나는 바람이 불어 그녀가 날아가 버리면 어쩌지, 하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내 그녀가 오른 발을 떼고 줄을 밟고 관객들이 침을 꼴깍 삼키려는 그 찰나에. 뻔뻔하게도 나는 네게 연락할 용기가 나더라.
 
.
.
.
 
한, 네 생각을 하면 자꾸만 목이 아프다. 아주 둥그렇고 무거운 가루가 찰싹 들러붙어서는 큰 동그라미를 그려. 이상하지, 나는 그 안에 꽉 찬 세모꼴 모양이 왠지 낯설지가 않아. 여자가 한 발씩 움직이자 줄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쭈뼛 곤두선 너의 발끝이 생각났다. 나는 종종 미묘한 긴장감과 짜릿함을 느끼곤 했었는데. 마구 푸르러지다가, 푸르러지다가, 이내 기억은 흐트러져버려.
 
한아, 곡예사의 발등 위로는 이미 흐트러져버린 세상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떤 낯섦에 익숙해지는 것이 이별이라면, 나는 아직도 남아있어.



나의 

플라타너스 
나무에는.
‌
‌

 ‌ 날씨는 흐림
‌  이동근


  나는 아무말을 사랑하고 필기감은 부드러워,
  그래서 당신 이름을 적었지

  다정한 목소리보다 다정한 글씨체를 선호하죠
  오늘은 어제보다 밝군요

  어느 날 당신이 찾아오겠지
  모든 환멸을 경배하며 당신의 귓가에 사랑하고 싶다고 속삭이겠지

  구름 사이로 지은 표정
  환희와 후회는 언제나 같은 순간에 찾아온다는 사소함

  그대, 거친 질감의 종이 위로 거의 모든 것을 지어낸 진짜 이야기

  난해한 수학공식 만큼이나 가련한 당신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춥군요

  어느 날은
  당신 눈 속에서 태양을 본 것 같았는데

  연필이 부러지는 날이면 부러진 심을 붙잡고 죽은 계절의 이름을 끄적였다

  나는 아무 말을 사랑하고 필기감은 부드러워,
  적고서 도로 지운 말이 있지

  태양을 보았던 기억은
  눈을 감으면 잊을 수 있을까

‌

풍장(風葬)

슈리

지난 밤 꿈에서 이가 모두 빠졌다
빠진 이는 깨진 각설탕처럼 잘게 부서졌다
다시 붙일 수 없이 부서진 조각들을
양손 한가득 쥐고 뛰었지

해야 했는데 하지 못한 말은
속에서 부서져 흩어졌었다
다시 태울 수 없는 잿더미를
한가득 품고 너를 보았었다

부서진 이를 모두 붙여줄 사람
애타게 찾았지만.
바람이 불어도 주먹은 차마 펴지 못하고

못하고, 못하고, 못해서,
그래서, 어째서, 도무지.

네가 떠나갔다, 는 뼈만 남은 사실에
혼자 자꾸만 살을 붙이면
잘못 복원된 화석이 된다
다시 뼈만 발라내면 살은 금세 문드러지지

붙일 수 없었던 잇조각들을
결국은 입에 물고 뛰다
마침내 너를 마주쳤는데
마주친 너를 부르려는데

이도 말도 흩어져 버려서,
목소리마저 속에서 흩어져 버려서,
그래서,
어째서,
도무지,


최서영

‌폭죽에 관한 누군가의 일기

01, 03

 

첫째 날
의뢰를 받았습니다. 가장 폼나는 폭죽을 만들어 달라고요. 제작 기한은 열흘, 가격은 미상, 수량은 오직, 딱 한 개, 특이 사항은 ‘폼나지 않으면 이 계약은 없던 걸로 하겠다’는 것.
그래서 폼나는 게 뭔데요? 아니 누가 요즘 멋지다도, 끝내준다도 아니라 ‘폼난다’고 표현하는지요.

셋째 날
이틀 내내 턱 괴고 고민했는데, 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폼 나는 것. 포장이 그럴듯해서 폼나는 건 너무 진부하지 않나요. 아 그렇다고 폭죽에 있어서 폼난다는 게 세상 사람들 다 깜짝 놀랄 정도로 뛰어나게 독창적이거나, 그럴 순 없잖아요.

06

 

여섯째 날
어제는 친구들이랑 맥주 한 잔 하면서 이것저것 얘기해 봤습니다.
주문 제작이 하나 들어왔다. ‘폼나는’ 폭죽이라는데, 아 그래서 그 놈의 ‘폼나는’이 뭐냐고.
친구하나가 잔을 놓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합니다.
“’폼!’ 소리가 나는 폭죽인거야…... 폼! 나는 폭죽인거지…어때!”
이게 무슨 소리..!
그러다가 왼편에 앉은 친구가 말합니다. 아니 근데 폼나려면, 일단 ‘폭죽다운’게 뭔지 알아야하지 않겠냐고.
폭죽 나름대로의 목적이 뭐냐고 묻는다면 소리로, 폭죽에서 나오는 콘페티로 사람을 즐겁게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빛나게 (혹은 요란하게) 시작되었다가 허망하게 꺼지고 마는 폭죽을 처음부터 끝까지 폼나게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면 나는 폭죽 끝에서 흩어지는 그 빛, 그리고 흩날리는 종이조각 두 가지를 가장 평범하게, 가장 ‘폭죽적’이도록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황, 숯, 질산칼슘으로 만드는 그 폭죽 말입니다.

11

 

열한번째 날
잘 다녀왔습니다. 폭죽을 터뜨리러 갔다 왔습니다. 폭죽을 쐈을 때 흩어지는 종이 가루에 노을빛과 바다의 짭조름함이 담기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어제는 너무 흐리고, 빗방울도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의뢰인과 폭죽에 불 붙여 터뜨리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의뢰인은 폭죽을 조용히 밟아 놓곤 근처 요리집으로 절 이끄더군요. 즐겁게 잘먹고 왔습니다. 우리가 다녀온 바다 근처 공터에는 폭죽에 빗방울 맺혀 불 꺼져 바닥에 힘없이 내동댕이되어 터져버진 폭죽의 종이가루가 하늘에 흩어진 불빛과 종이만큼 화려하게흩어져 있을 겁니다. ‌빗방울 아래 잠겨버린 노을의 그 빛과 바다, 그리고 옅은 폭죽 냄새와 함께 말입니다. ‌


‌

+

 

또다른 이야기의 마무리
이제 불을 붙일게요. 자,

:
:

-‘폼!'

‌

『함께의 그리움2』


추영진, 2017

‌『함께의 그리움3』


추영진, 2017

『함께의 그리움4』‌ 추영진, 2017‌

 

‌


다시 모인 마음들이, 안녕
Review of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안희연-
김상민

  언젠가 도서관에서 다섯 권의 책을 빌리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책의 대출기간이 보름이었으므로 앞으로 나의 보름은 손 안의 책 두께만큼으로 압축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길 때 마다 그 페이지를 읽는 데 들인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러니까 손안의 10cm 남짓은 내 보름 동안의 조각난 시간이 쌓일 두께일 터였다.
 독자에게 독서의 시간이 책의 두께로 치환된다면 렌즈의 반대편처럼 작가에게는 창작의 시간이 책의 두께로 압축될 것이다. 책의 크기는 작아도 그것이 담고 있는 것은 결코 작지 않다는 말을 나는 책이 어마어마한 지식이나 진리를 담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책 속에 작가의 시간이 높은 밀도로 압축되어 있다는 말로 이해한다.
 시인 안희연의 여행기 <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여행기는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이 있다. 책 속에 두 층위의 서로 다른 시간이 겹쳐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여행을 하던 작가의 시간(여행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책으로 엮어내는 작가의 시간(문학의 시간)이다. 누군가 안희연의 여행기에 실린 사진과 에피소드를 보며 감동한다면 그것은 사실 여행의 시간 자체가 아니라 문학의 시간이 덧씌워진 여행의 시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여행은 ‘지금 이 순간의 이름들’로 한 권의 사전을 편찬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펼치면, 색색의 기억들이 상연되는 극장.
 -202p, 지금 이 순간의 이름 중- 

 여행의 시간, 경험하는 시간

 여행의 시간이란 이런 것이다. 몇 해 전, 안희연은 유럽 여행을 하다 브레멘의 한 광장 벤치에 앉았다. 밝은 햇살이 광장 반대편의 건축물에 부딪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건축물 맞은편 벤치에 앉아 안희연은 한 앳된 연인을 바라본다. 소녀는 키스를 조르고 있었고 소년은 소녀를 밀쳐내고 있다. 그들의 몸이 만들어내는 각도가, 자꾸만 소년 쪽으로 기울어 가는 소녀의 각도가 안희연의 마음에 어떤 파문을 만들어 낸다. 안희연은 얼른 사진기를 꺼내 순간을 담는다. 순간이 사진기 속에 남는다. 동시에 안희연의 마음 한 조각이 그 자리에 남는다. 브레멘을 떠날 때 안희영은 마음 한 조각을 광장에 남기고 돌아온다.

한번 여행을 떠나면 기본이 한두 달 이었으니 그간 마주한 장소나 풍경도 어마어마하게 많을 것이다. 게다가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는 것은 그 장면에 마음을 움직인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일 텐데
-21p, 잔상과 여진-

 문학의 시간, 덧씌워지는 시간 
그리고 몇 해 뒤, 안희연은 떠나간 누군가를 생각하며 문득 브레멘 광장을 떠올린다. 곧이어 여행의 시간은 문학의 시간 속으로 들어온다. 작가는 여행의 시간을 현재의 상황과 감정에 연결시켜 종이 위에 배열한다. 문학의 시간을 거친 브레멘 광장의 시간은 이렇게 서술된다.

 그러다 우연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이 있었어. 몇 해 전 유럽을 여행하다 브레멘에서 보았던 장면. (중략) 브레멘 광장에서 보았던 젊은 연인.
 나는 맞은편 벤치에 앉아 그들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아주 젊은, 아니 앳된 연인이었는데. 소녀는 계속 키스를 조르고 있었고 소년은 귀찮다는 듯 소녀를 밀어내고 있었지. 나의 시선을 붙든 것은 다름 아닌 소녀의 기울기였어. 쏟아질 듯, 흘러 넘칠 듯 위태로워 보였던 소녀의 기울기. (중략) 나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사랑은 상대를 향해 한없이 기울어지는 마음이고 기울기가 크면 클수록 존재는 위태로워 진다는 생각을.
(중략)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랬어. 나는 소녀에게서 내 사랑의 방식을 읽어 내고 있었어. 너무 사랑하면 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멈추는 방법을 몰라 까맣게 타들어 가던 날들. (중략) 나는 너무나 기울어져 있었던 거야, 어리석게도.
-189~190p 너를 사랑한 시간 중-



그러니까 문학의 시간은 박제돼 있던 여행의 시간을 불러내어 현재를 덧씌우는 작업이다. 여행기의 제목은 이런 과정들을 그대로 담아낸 것은 아닐까.

다시 모인 마음들이, 안녕.

많은 시간과 장소에 흩어진 마음들에 찾아가 인사하고, 그 조각들을 2cm 남짓한 두께의 여행기에 담아내는 일을 작가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여행도 문학도 모두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으므로. 두 시간의 겹침이 작가의 마음에는 어떤 화학 작용을 일으킨 듯 보인다.
 
그곳에 펼쳐진 알록달록한 풍경들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인사를 건네게 됐다. 그간 안녕했냐는 인사와 앞으로도 안녕해 달라는 인사.
 앞으로도 나의 삶은 그런 인사들로 채워질 것이다. 매사 헛발질만 하며 사는 것 같아도 그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었음을 부정할 수 없듯이. 그걸 모르지 않기에 삶은 더욱 애틋하고 한걸음은 언제나 멀 것이다.
–247p, 아주 먼 한 걸음-

 
 따라서 이 책의 창작은 독자를 위한 일이 아니라 안희연 시인 스스로를 위한 과정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시인이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하고 인사하면 책의 모든 흩어졌다 다시 모인 마음들이 시인에게 안녕, 하고 인사하는 장면이 자꾸만 상상된다. 그래서인지 이 여행기는 누군가의 연애편지를 읽는 느낌으로 읽어갔다.

‌

‌PHOTOS BY CHAY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