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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래간만입니다.
저를 처음 보실 테지만, 기꺼이 문을 열고 들어오세요. 아니 문을 여는 시늉만으로도 충분할 거예요.
반갑습니다.
마음 편히 앉아요. 담요도 좀 덮고요. 당신에 대한 흥미롭고 낡은 이야기들을 해줄게요. 전혀 생경하고 완벽히 타인으로서의 당신에 대해서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 말아요. 단지 술에 취해있는, 불면에 너무 시달린, 성미가 고약한 사람일 뿐이죠. 거뭇한 입에서 배설되는 말들에 진위성과 당위성 따위는 아무런 무게도 가지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걱정 마시라니까요. 물론 큰 주의를 기울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 한 조각도 결코 소모하지 않을 테죠. 설령 제가 그러길 바랄지라도요! 그래도 한번 들어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때요? 여행 중이신 것 맞죠? 가는 길이 어쩌면 조금 덜 권태로워질지도 몰라요.
당신을 이곳의 객쩍은 공상에 초대할게요. 바다는 찐득이며 철퍽이고, 벌써 비워버린 술병 네댓 개, 노랗게 익은 가로등. 바닷가 근처의 노점상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기왕이면 잔뜩 나른한 남쪽이었으면 좋겠어요. 싸구려 바다 빛을 담은 플라스틱 의자 위에, 저는 앉아있답니다.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딜 보고 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밑이요? 아니요! 선택지에 없는 대답이었어요. 함정이었죠. 여기엔 앞만 있거든요. 위쪽 옆쪽 아래쪽은 다른 세계의 언어고요. 비행기 타시는 것을 좋아하시는지 조금 궁금해지네요. 아, 저도요. 나쁘지 않죠.
다만 세계는 필연적으로 창의 밖에서 유영하고 여기에는 이름이 없고 또 무엇보다 번개가 치는 걸 보는 것은 지나치게 날것의 경험이라. 그러나, 그래서 여기에서는 그 어떤 미친 공상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출발지와 목적지만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공간을 달려가고, 또 지워내고. 그건 마치 제 나름의 화음 속 카코포니 한 조각이, 싸구려 바다 빛의 플라스틱 의자가 내는 덜거럭 소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 슈뢰딩거의 고양이 꼬리가 잘린 채 야옹하는 것.
상자를 열어두지 않은 채로 두는 것이 때로 더 좋을 때도 있어요.
전 그렇게 할래요.
오래되고 또 무용한 상상을 끓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니까.
최서영
‘고마워’ 다음에 쓸 말을 생각하던 늦깎이 소설가 그녀는
1.
‘천만에’
를 생각하다 천만해와 헷갈리고 천만의라 적은 그녀는
의를 지우려다 뒤에 ‘말씀’을 적어 내린다
2.
‘나의 기쁨’
엄마는 늦은 나이에 글을 쓴다
그래서 에와 해와 의를 헷갈린다는 핑계로 떠오른 몇 자를 너에게 남길 수 있구나
사실 늦은 때는 없어 시작의 기쁨이 있을 뿐 그리고 너는 그 중 가장 큰 나의 기쁨
3.
‘너는 잘 왔단다’
눈도 뜨지 못하던 자그마한 너는
길을 잃지도 않고 이렇게 나에게 잘 찾아 왔구나
나에게 잘 왔듯 모든 이들에게도 오길 잘한 사람이 되도록 그들을 찾아가봐
그러나 분명히 마주할 그들의 냉대와 무관심을 너의 잘못으로 돌려 스스로를 옭아매지마
아이야, 무릇 살아가는 건 유화 같은 것 아닐까
덧붙이고 더하고 섞어서 멀리서 바라보는 우리의 삶, 언어, 몸짓
잔뜩 뭉쳐서 굳어 있는 물감을 가까이서만 바라보려고 하지 않아도 돼
잘못한 것을 감추고 지워야 한다는 걱정이라는 캔버스는 당장 내팽겨치는 거야
4.
‘걱정 말거라’
걱정은 할수록 쌓이고, 곱씹을수록 목 뒤로 넘어가지 않는다
모든 걱정에는 장화와 초콜렛만 준비하면 돼
5.
‘언제든지’
나에겐 재잘거리고 투정 부려도 된단다
*
‘천만에’는 my pleasure, you’re welcome, no problem(worries), any time 과 같이 다양하게 표현된다.
Photograph by 차야
슈리
실상 마술사의 키는 크지 않았다
그게 그 마술의 비밀이었다
그 토끼의 털은 완벽히 눈부시군요
투명한 털빛에 눈이 멀 것 같아요
집어삼킬 듯 붉은 눈동자가 경고 사이렌처럼 소용돌이치고
새것처럼 뻣뻣한 모자와 지팡이에 흰 털이 자꾸만 묻었다
모든 마술은 어차피 들키기 위한 것이야
토끼가 발 밑에 수많은 굴을 파대면서 킁킁거렸다
닳아 버린 껍데기들로 돌탑처럼 쌓은 단상은
토끼의 콧김에도 쉽게 흔들렸다
마술사는 가림막을 들고 서서 미소를 지었다
감쪽같이 뻣뻣한
계속 자라는 토끼의 앞니를 끊임없이 다듬어야 했다
천만에요, 마술사는 습관처럼 말했다
수많은 느낌표와 물음표에 대한 대답이었다
순서대로 조명이 번쩍이고
오차 없이 폭죽이 터지고
마침내 막이 내린 뒤에는
토끼가 계산된 변수들을 오물거리며 밤새 킬킬거렸다
토요일에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텅 빈 공원에 공이
굴러다닌다 던진 사람은 있는데 받는 이는 없는 곳
아이가 달려간다 가로수에는 동그란 눈알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등 뒤로 통, 통, 튀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눈들은 지나온 길을 내려다본다 지나온 발걸음을 따라
검게 그림자가 칠해져 있다
어떤 눈알은 그림자와 시선이 겹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어느 한 쪽은 웃어버린다
공은 주인을 찾아 뛰어간다
나를 잃어버렸는데, 나를 놓쳐버렸는데, 날 버리지 마
아이는 자신의 상상에 쫓긴다
등 바로 뒤로 공이 튀는 소리가 들려오고 아이는 눈을
질끈 감는다
자신이 아무것도 못 보는 듯 공 역시 그러기를 바라면서
눈알들은 이야기의 결말을 구경하다 이내
퍽 재미없는 단막극이었어 눈동자를 돌려버린다 도로는
다시 조용해진다
주위가 웅성거리자 아이는 살며시 눈을 뜬다 공들이 아이를
둘러싸고 있다
달리는 사람 앞으로 공 튀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구르다 멈춘
공이 공원을 둘러본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