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리
그러니까 나는 가던 중이었는데
가던 중이었는데 그래 걷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멈추었어
문득 이 도로의 이름이 기억나질 않았고 그래서 전화기 너머에 여기가 어딘지 말할 수 없었고
그래서 길을 잃고 말았어
도로 위는 얼어붙은 불빛들의 콜라주
도드라진 것들과 푹 꺼져 버린 것들 틈에서
공간은 어떻게 흘러갈까
의심만 해 온 벤치에 앉았다
진짜 의자가 맞았고 그러는 와중에도 도로 위는
12월이었다 보낸 것들과 올 것들의 축제였다 보낸 적 없는 것들이 떠나버렸음을 깨달았다
여기라고 생각했던 곳이 온통 저기였고 거기였고 어디였다
종이 울렸다 운석이 쏟아지는 것처럼 요란한 불꽃놀이였다 어쨌든 도착해야 해
돌아봐도 빠져버린 뜨개질 코는 찾을 수 없었고
잊어버린 알약들이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었어
던져지듯 여행자가 되어 목도리를 여몄다
왜행성이 아주 긴 궤도를 도는 것처럼
언제나 새로울 만큼 긴 궤도를 도는 것처럼
차야
그가 입을 열자 아세톤 냄새가 눈을 찔렀다 선홍빛 매니큐어는 약지에만 발라져 있었다 그는 그것이 어떤 신호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끝내 무슨 의미인 줄은 몰랐다
그의 사인은 아세톤 중독입니다 아세톤 냄새는 부적절한 암시와도 같죠 그와 입을 맞출 때 나는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숨을 멈춥니다 입술이 하얗게 질리게 됩니다 어떻게든 산 사람처럼 보이려고 자꾸만 입술을 깨뭅니다 피가 턱까지 흐를 때 그의 혀가 그것을 핥습니다 톡 쏘는 냄새와 비릿한 냄새가 뒤엉킵니다 그럴 때마다 구역질이 나는 동시에 섹스가 하고 싶어집니다 이것도 아세톤 때문이었나요 선생님
갓 죽은 시체의 입에서는 아몬드 냄새가 났다
슈리
1
네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너를 떠올리지 않으면 네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내 실어증은 너 때문이야.
알겠니, 내 혀를 잘라 간 건 너였어. 다시 붙이고 싶어도 혀는 아직 네 손에, 아니 바지 주머니 깊은 곳에 잊힌 채 버려져 있다. 돌려달라고 말할 혀가 없어서 나는 매번 돌아섰다. 혀 그림자만 점점 길어져 입안을 가득 채웠다. 뱉어도 뱉어도 빛이 들어올 자리는 생기지 않았다. 나는 입을 잠갔다.
수많은 만약을 거슬러도 그 밤은 꿈쩍하지 않는다. 너에게도 그 밤이 아직 묻어 있을까, 네게 묻고 너를 묻어버리고 싶어. 혀가 꼬인 너는 너무 무거웠고 단칸방이 토막낸 밤은 너무 깊숙했다. 조각난 나를 모아봐도 다시 맞출 수 없었다.
너는 그 밤을 어디에 묻었니.
2
활시위도 성대도 떨리지 못해서
결국 어떤 과녁도 쏘지 못해서
어떤 주파수로 쏘아야 너에게 닿을지 알지 못해서
아니 그렇지만 너에게 다시는 닿고 싶지 않아서
내게 닿았던 너의 그 손들도 시간이 지나면 숨이 죽을까
숨이 죽은 손들을 한 겹 한 겹 포개 관에 눌러 담을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이 궁금해도 동강난 단어들은 자꾸만 죽어버리고
너를 죽이지 못하는 나를 몇 번이고 죽여버려도
3
속에서 나를 찌르던 유리조각들을 꺼내 기워 보니 조각보가 될 줄은 몰랐다 덮을수록 더 추워져서 더 많은 조각보를 깁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이게 이렇게 따뜻할 줄은 까맣게 몰랐다
붙박이장처럼 자리잡은 밤들을 떼어낼 수도 없고 이사를 갈 수도 없다 하지만 괜히 모서리에 긁힐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안을 조각보들로 채우기로 했다
혀가 잘리는 것보다 무서운 건 스스로 혀를 깨무는 것이다 늦은 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혀가 눈물처럼 길게 길게 쏟아져 나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반 년만큼이나 긴 혀였다 저리도록 길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멀었는지
ㄱ.
어젯 밤 나는 무려 비늘을 여덟 개나 뜯어내야 했다.
한 시간에 하나씩. 아침까지 세어야 할 숫자들이 너무 많아서 잠에 들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엔 마땅한 것이 없었다. 현이 떠난 날부터 자꾸만 숫자들이 둥둥 떠다녔다. 그러나 덕분에 쉽게 외로워지지 않았다. 나는 유민의 책장에 있는 책의 개수부터, 현이 떠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는지, 이가 깨진 찻잔이 몇 개인지, 그리고 매일 아침 유민이 속삭이는 것과 같이 그가 어항에서 꺼내져서, 갈리고, 포트멜리온 접시에 올려진다면 몇 개의 조각일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온 밤 내내 세어보고 있었다. 연노랑빛 개나리가 그려진 접시 위에 놓일 나를 상상하자 전율이 일었다. 몸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이유가 뭘까. 몇 개 남지 않은 비늘을 또 떼어낼 순 없어서, 그냥 다음에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일단 날씨가 너무 애매했다. 이게 모든 것의 이유가 아니라면 너무 축축해져야만 할 것 같아. 유괴된 우리의 대화는 어디에 있을까.
ㄴ.
그의 순진한 눈동자, 그래서 악랄해진 시선을 나는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성당까지 쭉 걸어가던 그 날의 침묵도. 얘기는 앉아서 해야한다는 건 언제나 우리의 암묵적인 진실이었다. 매일 반복하는 벤치로의 산책,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지만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다고 말하려 하지 않았다. 벤치 옆 연못에는 물고기가 살았고, 그가 성큼 뛰어 올라갈 때부터 나은 이끼냄새를 진작에 맡아버려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잉어가 살고 있을 그 연못내음이 오래 전부터 익숙하지 않았다. 그나마 금붕어는 봐줄만한 축에 속했지만 오빠처럼 손을 넣어 휘적휘적 저을만큼의 용기는 나지 않았다.“넌 왜 물고기가 싫어?” 그가 물었다. 별로 추운 날이 아니었는데도 그의 눈썹 털이 바싹 곤두서있었다.
- “일단 거의 네 팔뚝만하잖아.”
나는 계속 동전을 문지르면서 주황색이 손가락에 붙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게 뭐 어때서?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곤란하거나 뒤틀린 것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고요해져야만 했다. 물고기가 팔딱일 때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 나는 팔뚝만한 것들이 일으키는, 주체할 수 없는 그런 살아있음을 혐오해.
ㄷ.
나는 없는 입술을 한데 오므리고 또 규정된 공기의 총량에 매겨질 수 있는 숫자들을 세어보면서 현과 유민 옆에서 항상 꾸물대고 있을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 조용한 관찰도 공기의 소모를 필요로 했다. 이것이 진흙에 박혀지기 전의 모든 일, 간혹 빠금거리거나 까룩거리는 것이 전부인 나는 대단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의 이름은 폐, 나는 낡아버린 농담이다. 세상은 둥그렇지만 또 찌그러져 있다는 것.
ㄹ.
조용한 관찰도 공기의 소모를 필요로 했다